단풍이란 말 참 좋지요. 노랑, 주홍, 다홍, 빨강. 마음이 단박에 물들어버리는 단어입니다. 얼마나 좋으면 굳이 먼 길 떠나 줄 서서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죠. 설악산, 내장산 등 전국의 단풍 명소엔 사람들이 단풍보다 더 많습니다. 그리고 더 울긋불긋합니다. 우리나라 등산복의 색감이란! (웃음) 봄에는 꽃보다 화사하고 가을엔 단풍보다 화려하죠. 우리는 제일 고운 옷 차려입고서 귀한 시간을 내어 곱디고운 단풍을 보러 갑니다.한 달 전쯤 부산에서 하는 인문학 팟캐스트 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술에 대해

나는 도서관 단골입니다. 이러니 어딘가 지성인 같지요. (웃음) 지적인 소양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몸과 맘이 지칠 때에 책 냄새를 맡으면 왠지 평온해져요. 맘이 가는 제목의 책을 뽑아들고 죽죽 읽어나가면 가슴을 꽝 울리는, 요즘 말로 띵언을 쉽게 캐낼 수 있죠. 내 마음이 준비됐을 때 책은 보여줍니다. 가만히 사유의 문을 열어 환기시켜주죠. 나이 들수록 현명해지고 싶어서, 나이 들어도 꼰대가 되긴 싫어서, 나는 시간 날 때면 도서관에 갑니다. 그곳의 느릿한 공기와 잔뜩 낮춘 나직한 목소리들이 너무 빠르던 나를 멈춰주거든요.우리 집에서

삶의 우선순위가 애호 순위이고자 애쓰며 삽니다. 애호도 굳이 애써 찾아야 하고 차근차근해봐야 알죠. 내가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시간과 마음을 들여봐야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처럼 얘기합니다.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그놈의 시간이 없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고 좋아하는 당신도 자주 만날 수가 없다고요. 하지만 진짜 그런가요? 정말 그렇게 바쁜가요? 시간은 내고자 하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일을 혹은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죠.격무와 격랑 속에서 얼이 빠졌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토요일 오전 시간. 서

태도가 사람을 보여줍니다. 얼마 전 《심미안 수업》 저자이신 윤광준 선생님 특강을 들었습니다. 오전 강좌여서 어르신들이 주로 많았는데요. 강의는 매우 유쾌하고 즐거웠습니다. 시종일관 가볍고 경쾌하게 강의해 주셨지만 메시지는 묵직했죠. 우리는 지금부터 돈이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쓰고 살 것인지, 앞으로 표면이 아니라 본질을 얼마나 들여다볼 것인지 더 고민해야 된다고요. 굳어있던 머릿속에 신선한 바람이 훅 불어왔습니다.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였어요. 맨 앞에서 두 번째 앉아있던 백발의 할머님이 손들고 아예 강단으로 나가더

올 초에 동유럽 여행을 했다. 솔직히 주눅이 들었다. 유러피안들의 생김부터 도시와 풍광의 위용, 특히 그들의 문화 예술. 가히 압도됐달까.벨베데레 궁전에서 클림트의 키스를 보곤 정신없이 홀려버렸다. 기껏해야 여름 한철 궁전인 쉔부른 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화려하고 장엄한 예술과 오브제들을 보곤 잠시 우리 경복궁 근정전이 초라하게 스쳐 지나갔다. 장관이었다. 모든 것들이 입체적으로 감각됐다. 예술 작품도 황금빛 넘실 초록빛 물씬, 색감과 질감이 풍성했다. 건축도 단 하나의 세심을 놓치지 않고도 웅장미 흠씬하게 우뚝했다. 게다가

소유에 초연한 편이다. 본성이 착해서는 절대 아니고 외려 게을러서가 맞겠다. 욕심부린다고 내 것이 되지도 않거니와 마음만 괴로워진다는 걸 일찍 깨쳤다. 되도록 느긋했고 포기도 빨랐고 안되면 딴 거 하라! 외쳤다. 다 나를 위해서였다. 그래서 성공이나 성취와는 멀리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그랬다. 물론 오해가 생겼다. 워낙 사는데 여유가 있으니 그렇지. 아쉬울 게 없으니 저렇지. (웃음) 처음엔 손사래를 치며 어이없어했지만, 이제는 그리 보일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돈 버는 일 같기도 하

봄날은 짧다. 점점 더 짧아진다. 다홍빛 노을이 초여름의 달뜬 공기를 몰고 오던 날에 친구가 전화를 했다. 해가 지는 걸 보는데 눈물이 난다고. 딱히 슬플 이유도 없는데 왜 눈물이 나지 갱년기 우울증인가 그러다가 느닷없이 손상기 화가 이야기를 꺼냈다.― 나 고백할 게 있어. 나 손상기 작품 너무 좋아하잖아. 그때 키아프(KIAF) 갔을 때에도 작품 앞에 오래오래 서 있었잖아. 기억나지. 그 일몰.당연히 기억나지. 내가 본 일몰 중 가장 슬픈 풍경.해가 지는 풍경은 늘 좀 슬프다. 하루의 고단 끝에서 잠시나마 생의 안도를 맛보는 순간

금요일 밤은 여전히 설렙니다. 일주일의 피로를 한 방에 날려줄 끝내주는 모임이나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금요일의 모든 풍경은 어제보다 경쾌하죠. 금요일 밤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어여쁘고 근사해서 보고만 있어도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사람. 시시한 이야기에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겠죠. 맛집 따위 아니어도 어디든 둘만의 맛집으로 만들어버리고요. 금요일의 거리는 바로 이 사람들이 주인이죠. 하지만 주인 아닌 주변인도 덩달아 설레는 금요일 밤입니다. 사랑할 순 없어도 꿈꾸는 거로 충분한 사람들. 사랑의 절기를 지난 사람들

고기는 다 좋아한다. 육고기, 바닷기, 콩고기까지도. 예술을 좋아한다. 그림, 음악, 문학 등. 고기도 생겨자 올린 목살 제일 좋아하듯이 문학 중에는 시를 제일 좋아한다. 그런데 시 좋아한다고 하면 뭔가 닭살스럽고 철없는 문학 아줌마로 보는 면이 있어 나의 깊은 시심을 숨기며 살았다. 그래도 시집은 늘 손에 닿는 곳에 두었다. 힘든 시간에는 아무것도 읽기 싫다. 어려운 틈에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육체의 피로와 노독 앞에 예술이니 인문학이니 다 개 풀 뜯는 소리가 된다. 나는 늘 삶이 그리되지 않도록 애쓰고 살폈다. 좀 늦되고 둔

여행은 날씨가 반이다. 나머지 반을 사람이 풍경이 먹을거리가 채운다. 그런데 어느 한가지가 모든 걸 덮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밤새 세찬 봄비가 겨울의 바짓가랑이를 적시듯 내렸다. 겨울이 슬쩍 주저앉았다. 충북 영동으로 문화예술기행을 앞두고 있었다. 모두 친한 분들과 함께다. 게다가 로 유명한 박종인 기자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이 여행에 이라는 아름다운 부제도 붙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아뿔싸 꽃샘 비바람은 마음을 바짝 졸이게 했다.역시 운이 좋은 사람은 오던 비도 멎게 한다. 공기는

블랙홀은 아름다웠다. 모든 걸 소멸시키는 시커먼 공포가 아니라 오렌지빛으로 생성하는 추상화 느낌. 인간이 그것을 촬영했다는 기술의 개가에 앞서, 5500만 광년이나 떨어진 아득한 그곳이 이곳에서 보니 다만 아름답구나 느낄 뿐이었다. 우주도 역사도 지금 여기서는 너무 멀고 아득하다. 거대함도 위대함도 그저 짐작해볼 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얼마나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인가! 무리하게 감탄하며 자존감 뚝뚝 떨어뜨릴 일도 아니지만, 어떤 계기에는 나의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만히 사유하는 시

꽃이 피는 얘기를 하기 싫다. 꽃을 보는 사람 얘기를 하고 싶다. 그림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꽃보다 사람에, 그림보다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구례로 꽃구경을 간 언니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마치 우화등선처럼 전화를 걸어서는 꽃멀미가 난다며 이 꽃천지 좀 보라며. 사방에 산수유, 벚꽃 만발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냥 꽃이 된 언니 얼굴만 보였다. 꽃물이 발갛게 든 두 뺨만 보였다.옥수동 응봉산 개나리 꽃무지에 다녀왔다. 사람들은 모두 노랑 말괄량이 꽃천지를 찍느라 야단법석이다. 세상

다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들어갔다. 마음은 아직 청년인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학업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위로의 슬로건을 꽉 붙들었다. 모든 일은 지금 하는 게 가장 젊다.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청년인 양 가벼웠다. 오히려 젊은 날엔 느끼지 못했던 젊음의 실체를 이제서야 명징하게 깨닫다니. 젊음은 아이러니다. 그때는 잘 모른다. 늙어가던 마음이 단박에 팽팽해졌다. 형광 오렌지색 필기구도 챙기고 맘에 드는 줄 없는 노트도 샀다. 서둘러 봄옷들을 꺼냈고 꽃샘추위 네까짓 거 하며 밝

처음엔 욕심이 났습니다. 동유럽 여행을 앞두고 나는 설레기보다 결연했죠. 세상 아름다운 볼 것들과 누릴 것들을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담아오자며 만 보 걷기를 위해 체력도 비축했습니다. 새로운 풍경과 낯선 사람들, 그 생경한 자극들이 삶의 스파크를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생의 강렬한 무늬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죠. 어쩌면 우리는 그러려고 자꾸만 더 멀리, 더 오래 떠나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 근사한 생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인생의 명장면을 남기기 위해서요. 프라하는 아름다웠죠. 뾰족한 첨탑의 틴성당과 구시가지 광장, 유럽에서

샛노랑 간판이 눈에 딱 띄었다. 갤러리쿱. 서울교대 사거리를 막 지나가는 길이었다. 비가 와서 차가 막혀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발라드 50곡을 재생 중이었다. 노랑색은 우중충한 빗속에서도 개나리처럼 명랑했다. 머릿속에 이미지론 산뜻하게 남았지만 굳이 찾아가게 되지는 않는 곳. 갤러리는 그런 곳이었다. 친구네 사무실에 들렀다. 바쁜 친구를 기다리느라 읽을거리를 찾다가 이라는 얇은 잡지가 눈에 띄었다. 편집도 독특했고 내용은 알찼다. 누군가의 진심이, 예술에의 열정이 느껴졌다. 나는야, 자칭 예술 애호가. 누가 이리 어렵고

딸은 사랑 중입니다. 500일 기념일이라며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더군요. 커플 이름 새긴 케이크를 주문하고 기념비적인 선물을 산다며 며칠을 고민하고. 한마디 하려다가 꼰대 엄마 소리 들을까 꾹 참았답니다. 사랑 그 징한 것 같으니. 딸과 둘이 가는 동유럽 여행을 예약했는데 그때부터 걱정이었습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문제의 그 '오빠'와 어떻게 그 긴 날들을 떨어져 지내냐는 것이죠. 고작 열흘을 가지고서요! 흥, 칫, 뿡! 그럼 가지 말라고 심통을 냈습니다. 그래도 인생 첫 유럽을 놓치지는 않더군요. 그럼요, 사랑보

대학로는 늙지 않는 거리다. 언제고 스물적 치기와 풋풋함이 가득하다.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연극 전단이 가득 붙은 거리 게시판과 들장미 소녀처럼 씩씩한 젊은이를 마주친다. 그녀는 솔톤의 경쾌한 목소리로 "우리 연극 보러오세요!" 호객이 아니라 당당한 고백 같다. 나는 연극을 사랑해요! 외치는 것 같다. 가벼운 미소로 응원하고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접어든다. 공원은 부대 시설들도 늘어나고 깔끔해졌지만 오래전의 그 모습 그대로다. 공원의 안주인으로 여전히 당당한 아름드리 마로니에 나무, 그 아래 벤치에 앉아 분홍 솜사탕이 묻은 끈적

북한산 국립공원 안의 작은 갤러리. 통창으로 사계절이 들어오는 갤러리 아트 세빈에서 오후를 비운 사람들이 만났다. 차 한잔 마시자고. 한겨울 맑은 창 앞에서 차 한잔 마시자고. 다회에 모인 분들은 거의 낯설었다. 차를 오래 마셔온 분이 다회를 이끌어 주셨고 차를 열심히 마셔온 분이 추임을 넣으며 팽주(차를 따르는 사람)를 자처하셨다. 잔은 작았다. 향과 맛이 날아가기 전에 마시라고 그렇다 한다. 보이차의 유래와 과정, 역사를 들으며 우리는 차를 마셨다. 낙타 눈물 만큼에다가 호록 마시기도 딱 좋은 온도였다. 그리 비운 잔은 엽렵하게

후배네는 캠핑을 갔습니다. 석쇠 위에 시뻘건 꽃등심이 약 올리네요. 친구는 백화점에 있군요. 애프터눈 티세트의 삼단 트레이가 젠체합니다. 주말의 SNS는 화려합니다. 행복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지요. 물론 타인의 행복에 눈꼴시려 ‘흥칫뿡!’하는 고약한 심보는 아니지만, 간혹 불안해질 때가 있어요. 세상은 이리 재밌고 화려한데 나만 이리 살아도 괜찮은 걸까 잠깐 자세를 고쳐 누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말엔 좀 제멋대로 해야 한다는 게 결론입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게 원칙이고요. 늦잠도 자고 재밌는

바야흐로 사진의 시대다. 핸드폰의 성능은 전문가의 카메라를 뛰어넘고, 사람들의 감각 또한 평범함을 뛰어넘는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가 보다 근사하고 독특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좋은 기능의 카메라를 원하게 되었고, 더 멋진 프레임을 원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걸 찍는다. 모든 일상을 담는다. 그리고 자기만의 구도와 색감을 찾아내는데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다. 사진은 이제 어엿한 예술의 범주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알싸하게 추운 수요일 저녁, 인사동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