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오해하다
키스를 오해하다
  • 임지영 / 갤러리스트
  • 승인 2019.02.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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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사랑 중입니다. 500일 기념일이라며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더군요. 커플 이름 새긴 케이크를 주문하고 기념비적인 선물을 산다며 며칠을 고민하고. 한마디 하려다가 꼰대 엄마 소리 들을까 꾹 참았답니다. 사랑 그 징한 것 같으니. 딸과 둘이 가는 동유럽 여행을 예약했는데 그때부터 걱정이었습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문제의 그 '오빠'와 어떻게 그 긴 날들을 떨어져 지내냐는 것이죠. 고작 열흘을 가지고서요! 흥, 칫, 뿡! 그럼 가지 말라고 심통을 냈습니다. 그래도 인생 첫 유럽을 놓치지는 않더군요. 그럼요, 사랑보다 여행이죠.

 

낭만의 도시 프라하를 거쳐 음악과 예술의 도시, 비엔나에 갔을 때입니다. 벨베데레 궁전의 미술관에 구스타브 클림트를 보러 갔지요. 클림트의 원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전 원래 화려한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화려함에 위축되거나. 클림트의 키스도 단순히 화려함의 극치인 명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죠. 벨베데레 궁전엔 각국의 관광객이 헤쳐 모여 하고 있었어요. 특히 많이 알려진 작품들 앞엔 바글바글. 전 클림트의 풍경을 좋아해서 초록 잎이 무성하게 둘러싼 작은 집이라거나 봄날의 물기 머금은 푸른 정원에 흠뻑 빠져 그림들 앞을 더디게 걷고 있었어요. 그때였죠. 저쪽에서 탄성이 들려온 것은.

 

키스였어요. 클림트 키스 앞의 젊은 연인의 키스.
젊고 빛나는 그들은 키스 속 연인과 똑같은 포즈를 잡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죠. 그 사랑스러운 광경에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진 것이었고요. 아! 참 좋은 때죠. 사랑은 순간인 거죠. 그렇게 난데없이 키스를 만났습니다. 세상에 가장 화려한 그림, 눈이 부시게 빛나는 그림. 키스.
깜짝 놀랐어요. 황금빛은 생각보다 더욱 강렬했고 정말 영원할 것처럼 아름다웠죠. 그 속의 남녀는 처음엔 황홀한 줄로만 알았는데 존재는 사그러드는 것이었죠. 황금빛과 대조되는 어두운 피부와 움켜쥐고픈 욕망과 소멸의 두려움까지. 놀랍게도 클림트는 키스 안에 생명과 죽음, 순간과 불멸, 관능과 사유를 황금빛 비단으로 감싸두었어요. 그의 키스는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죠. 사랑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렬했고 아름다웠죠.

 

구스타브 클림트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에로틱에 함몰된 호색한 화가가 아니었어요. 그의 예술엔 철학과 사유가 있었죠. 그것도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 사유 말이죠. 그러고보니 내가 오해한 것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 그저 한 시절의 화려한 사치 정도로 여긴 것인지도요. 젊디젊은 딸 아이의 유난 정도로 여긴 것인지도요. 사랑은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우주 같은 것. 존재의 별을 찾아 서로를 자기장처럼 끌어당기다 어느 순간 핵분열해 버리기도 하는 것.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 섣불리 단정 짓거나 흥칫뿡! 할 일은 아니라는 것.

클림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키스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생의 심연부터 환희까지, 순간에서 영원까지 모든 것을 껴안은 채 온전하게 빛나던 황금빛을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키스 앞에서 키스하던 젊은 연인도, 한창 사랑 중인 철딱서니 딸 아이도, 지금 이 순간으로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죠. 클림트가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사랑하라고. 그 순간에 살아 빛나라고. 영원불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다시 한 번 사랑, 그 징한 것 같으니.

동유럽 남자들은 기막히게 잘 생겼습니다. 딸과 저는 다시 태어나면 꼭 이곳에 태어나자 약속해 두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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