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생긴 일
프라하에서 생긴 일
  • 임지영 / 갤러리스트
  • 승인 2019.03.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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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욕심이 났습니다. 동유럽 여행을 앞두고 나는 설레기보다 결연했죠. 세상 아름다운 볼 것들과 누릴 것들을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담아오자며 만 보 걷기를 위해 체력도 비축했습니다. 새로운 풍경과 낯선 사람들, 그 생경한 자극들이 삶의 스파크를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생의 강렬한 무늬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죠. 어쩌면 우리는 그러려고 자꾸만 더 멀리, 더 오래 떠나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 근사한 생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인생의 명장면을 남기기 위해서요.

 

프라하는 아름다웠죠. 뾰족한 첨탑의 틴성당과 구시가지 광장,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렐교와 역사를 흐르는 블타바강. 도시 전체가 화보나 다름없는 풍광이었어요. 처음엔 감탄을 터뜨리며 마구 사진을 찍어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비현실적인 풍경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도시는 입체가 아닌 평면 같았어요. 갈 길이 바쁜 성미 급한 여행자는 전투적으로 풍경을 스쳐 지나갔죠. 비행기 타고 10시간도 넘게 와야 하는 프라하잖아요. 더 빨리 걸어야 했고 더 많이 보아야 했습니다. 구시청사의 600년이 훌쩍 넘은 천문시계 퍼포먼스도 좀 더 차분하게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카렐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성 얀 네포무크 동상을 더 오래 만져보고 싶었지만 줄이 길어 그러지 못했죠.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도시에 있으면서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실체가 되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던 거죠.

 

프라하 광장 뒷골목에서 저녁을 먹은 후 근처의 갤러리에 들렀습니다. 그림들은 주로 풍경화가 많았어요. 당연한 것이 보이는 풍광이 전부 다 작품인데 다른 걸 그릴 이유가 없을 테죠. 낮에 스쳐 지나갔던 프라하의 풍경들이 그림 속에서 생동했습니다. 신기했어요. 오히려 평면인 그림 속에서 더 생생해지는 감흥이라니. 그림 속의 카렐교에선 사랑스러운 연인이 서로의 어깨를 감싼 채 강을 바라다보고 있었죠. 성 비투스 대성당과 익어가는 오렌지빛 지붕들의 풍경도 실제보다 정갈하고 아름다웠어요. 예술의 미화일까요. 내 맘의 위안일까요. 둘 다라 해도 좋았습니다. 이 풍경은 어디였더라 한 작품 한 작품 천천히 들여다보며 마 음속 감흥을 되살려냈죠. 어느새 관광객의 조급한 심사는 사라지고, 낮의 번잡스러움도 잊었어요. 그림들 속에서 다시금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며 나는 게으른 여행자처럼 느긋해졌답니다.

 

문득 깨달았어요. 생의 감흥도 그릇이 있다는 걸. 내가 담을 수 있는 총량이 존재한다는 걸. 감동을 위해 먼 곳엘 왔지만, 그래서 욕심껏 보고 듣고 느끼고자 했지만, 나의 마음은 크고 깊지 못하여 쏟아붓는 감흥을 다 담아내질 못했던 거죠. 대신 광장 구석의 한 갤러리에서 보았던 프라하의 풍경화들이 맘속에 아로새겨졌습니다. 여행도 인생도 급할 것 없었죠. 어차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과 세월의 여정이 아니던가요. 이 오래된 도시가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예술 감상에 강박감이 있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복할 것이라는 감상 강박. 그래서 미리 공부했고 더 빨리 걸었고 더 많이 보려고 했죠. 덕분에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제일 많이 본 것 같아요. 그런데 내 마음이 그걸 온전히 담아내질 못하자 그만 흘러 넘쳐버린 거죠.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많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다만 한 장면이라도 담는 것이죠. 짧은 단상 한편이라도 남기는 것이죠. 더 많이 보고 느끼겠다는 강박은 버려야 할 예술 감상법. 설령 예술 앞에 아무 느낌 없다 해도 그마저도 취향의 자유인 것. 맘을 편히 먹자 자유로워졌습니다. 욕심내어 많이 볼 필요도 없었죠.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상태가 더 중요하니까요. 여유와 온기가 있어야만 마음속에 담아올 수 있으니까요.

 

강가에서 본 카를교를 쓱쓱 그린 아주 작은 그림 한 점을 샀습니다. 프라하는 그것으로 충분한 기분이었습니다.

<HCN 매거진 서초> vol.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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