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블랙홀을 보다
지금, 여기서 블랙홀을 보다
  • 임지영 / 갤러리스트
  • 승인 2019.04.1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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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은 아름다웠다. 모든 걸 소멸시키는 시커먼 공포가 아니라 오렌지빛으로 생성하는 추상화 느낌. 인간이 그것을 촬영했다는 기술의 개가에 앞서, 5500만 광년이나 떨어진 아득한 그곳이 이곳에서 보니 다만 아름답구나 느낄 뿐이었다. 우주도 역사도 지금 여기서는 너무 멀고 아득하다. 거대함도 위대함도 그저 짐작해볼 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얼마나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인가! 무리하게 감탄하며 자존감 뚝뚝 떨어뜨릴 일도 아니지만, 어떤 계기에는 나의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만히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년 봄마다 반포도서관에서 <서초 문화촉매자 양성과정>을 기획, 주관하고 있다. 오늘의 강연은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 이야기. 한 나라의 문화가 곧 역사고 우리는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재편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문화와 역사까지 아우르는 강사님의 열강에 잠시 먼 여행을 떠났다. 저 먼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답고 놀라운 예술과 고려시대의 자유로운 발상과 인식,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문화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우리 민족의 멋짐이란 것이 폭발했다.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고유한 우리를 지켜냈다. 은근과 끈기로 버텨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무수한 위기를 넘기고 우뚝 선 얼굴인 것이다.

자신감이 상승한 채 향한 곳은 페리지 갤러리. 서초구 KH바텍 사옥의 갤러리로 몹시 정갈하고 다정한 공간이다. 지하 1층은 갤러리로 지하 2층은 페리지홀로 좋은 전시와 공연이 연중 내내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디어아트 작가 정연두의 <지금, 여기>전을 보러 왔다. 이 미디어아트 작품은 하나의 다큐멘터리다. 고전과 신작으로 이름 붙여진 영상은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세 개의 화면과 그 속의 영상들은 서로 각기 다른 지점을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같은 접점으로 만난다. 얼핏 모두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개인의 역사 혹은 모두의 역사. 감정이 메마른 한 노인의 유년 이야기가 시간의 강을 타고 흐른다. 크레파스를 손에 잔뜩 묻힌 아이들의 이야기가 현재에서 무구하게 계속된다. 고전은 오래된 것이 아니다. 끝없이 신작으로 순환되는 것이다. 무한한 시간의 강을 흐르며 생성되고 되풀이되는 것이다.

 

신기했다. 45분간의 짧지 않은 상영 시간이 10분처럼 지나갔다. 영상에는 또 일본의 전통 이야기 예술 장르인 라쿠고 명인이 등장한다. 그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어찌나 능청맞은지 몇번이나 큰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옆사람도 함께 웃었다. 나는 웃음을 잘 못 참는다. 강의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웃음의 포인트를 읽으면 바로 즉각적으로 웃음 발사다. 리액션이 좋다고들 얘기하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보고 들을 뿐이다. 감동받기 쉬운 체질이랄까. 재미를 기민하게 느껴 웃을 수 있다면 삶이 조금 더 유쾌해진다. 일상에 숨어있는 사소한 재미들을 고구마 줄기 캐듯 캐내어 이것 보라고 이리 주렁주렁 달렸다고 까르르 웃으면 되는 거니까.

 

블랙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다. 역사 속의 미학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 존재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우주의 신비도 역사의 가치도 결국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주는 진실이다. 아주 까마득한 시절로부터 생겨난 존재로부터 유전에 유전을 거듭하여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것이다. 이토록 경이롭고 신비하고 고유한 우리의 존재라니! 물론 세월이 지나가면 우리도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별다른 치적 없이 시시하고 평범해서 서울 인구 5,000만명 중 일인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현재 자기 앞의 생을 살아야 한다. 오지 않은 미래 걱정 따위는 제쳐두고 항상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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