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신, 유관(柳灌) - 권력의 속성
조선의 문신, 유관(柳灌) - 권력의 속성
  • 강기옥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승인 2019.10.04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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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문의 유래가 살아있는 방배동 정문어린이공원

정순붕, 권력에 살고 죽다

권력의 불길을 좇는 불나비족은 권력이 다하면 다른 불길의 장작이 되는 것이 권력의 냉정한 속성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정순붕은 윤원형, 이기와 함께 문정왕후(중종의 계비)의 권력을 등에 업고 반대파를 철저히 제거했다. 권력을 잡은 소윤파는 윤임과 유관, 유인숙을 삼원흉으로 지목하여 1개월 만에 사사(賜死)한 후 사림계의 명신 100여 명을 유배했다.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명종 대신 계림군을 임금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계림군까지 죽였다.

그러나 정순붕의 악행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과 가문을 망치고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조선 시대 출세의 비결은 역모의 고변(告變)에 있었다. 고변만 잘 하면 출세가 보장되는가 하면 역모자의 재산과 노비를 상급(賞給)으로 받을 수 있어 꿩 먹고 알 먹는 횡재였다.

 

청백리 유관 vs. 탐관오리 정순붕

정순붕의 죽음에 대해서는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 이수광(1563~1629)의 《지봉유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상세히 소개해 놓았다. 유몽인은 정순붕을 죽인 노비가 유인숙의 노비라 했고, 이수광과 이긍익은 유관의 노비라 했다. 세간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야기가 야담이므로 기록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복수의 방법은 비슷하다. 그런 중에 안산의 문화류씨 묘역에는 ‘충비갑지묘’라고 새긴 상석과 묘 입구에 4정려각이 있어 그 실재성이 확인된다. 노비의 묘가 주인의 묘역에 있는 예외적인 경우다.

유관과 정순붕은 동갑으로 같은 시대를 살면서 나름대로 충성을 다 했지만 청백리와 탐관오리라는 상이한 평가를 받는다. 살아서는 정순붕이 앞장서서 유관을 죽였으니 그가 승리한 것 같았지만 선조는 유관을 신원복장(伸冤復爵)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578년에 정순붕의 관작을 삭탈(削奪)했다. 이에 따른 후세의 평가는 그들의 행적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연산군조차 두려워 한 역사의 평가다.

 

효자, 열녀에게까지 정려문 내린 세종

방배동 신동아아파트를 지나면 상문고등학교 언덕에 있는 상진과 유관이 백성을 위해 이 시대의 실상을 평하는 느낌이 든다. 정려문(旌閭門)의 대상자는 누구이며 어느 곳에 세워 오가는 이를 교훈해야 할지 논하며 후세를 걱정하고 있지나 않는지 머리가 숙여진다.

정문(旌門)은 고려 태조가 공신을 표창하기 위해 사당 앞에 세우게 한 것이 최초의 경우지만 이는 충신에 관한 일이다. 효자와 열녀에게까지 정려문을 내린 것은 세종 13년(1431년)의 일이다. 서초구와 인연을 맺은 세종이 정문제도를 확산했으니 방배동에 4정려각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려가 내려지면 그 집안은 강제 동원되는 요역(徭役)을 면제받는 복호(復戶)의 혜택을 입는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과부 며느리를 강제로 목매게 하여 열녀문을 받는 폐습을 낳기도 했다.

 

방배동의 4정문은 귀한 유물

정려문은 국가적 이념과 미풍양속의 실천을 권장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실시한 제도였다. 그만큼 소중한 가치가 있는 제도였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존숭(尊崇)하던 유림의 시대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 정문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를 지역적으로 확대하면 서울의 관문 방배동은 4정문이 서울의 풍속이 아름답다는 것을 상징하는 귀한 유물이었다. 다행히 신동아아파트의 서쪽 공터에 정문 어린이공원이 있어 4정문의 유래는 살아 있다. 그곳의 자연마을이 ‘홍문앞마을’이었으니 눈에 띄는 자리에 표지석이라도 세워 4정문의 교훈을 되새겼으면 한다.

<HCN매거진 서초> Vol.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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