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예술
단풍 예술
  • 임지영 / 갤러리스트
  • 승인 2019.11.0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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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시민의숲

단풍이란 말 참 좋지요. 노랑, 주홍, 다홍, 빨강. 마음이 단박에 물들어버리는 단어입니다. 얼마나 좋으면 굳이 먼 길 떠나 줄 서서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죠. 설악산, 내장산 등 전국의 단풍 명소엔 사람들이 단풍보다 더 많습니다. 그리고 더 울긋불긋합니다. 우리나라 등산복의 색감이란! (웃음) 봄에는 꽃보다 화사하고 가을엔 단풍보다 화려하죠. 우리는 제일 고운 옷 차려입고서 귀한 시간을 내어 곱디고운 단풍을 보러 갑니다.

한 달 전쯤 부산에서 하는 인문학 팟캐스트 <사이섬>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술에 대해서 향유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진행자가 묻더군요.

“삶에 여유가 없어서 예술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을 안됐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죠. 누구에게나 삶은 숭고한 것입니다. 실은 삶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한 것이죠. 그분의 말씀에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예술은 좋은 거라고 주장만 했지 배려는 하지 않았어요. 느끼고 감동해야 한다고 눈을 반짝였지만 상대의 눈이 반짝이는지는 보지 못했죠. 마음에 주홍불이 탁 켜지며 가만히 서서히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살다 보면 삶이 엄청 빠르고 벅찰 때가 있습니다. 일상의 번잡과 일과의 피로에 갇혀, 길 떠나는 일이 큰일인 양 버거울 때가 있죠. 뉴스에서 보여주는 단풍 지도가 먼 나라 얘기 같고, 단풍이 뭐길래! 잠시 시큰둥해지기도 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기 앞의 생이 우선입니다. 세상이 떠들썩해도 지금 나의 마음이 먼저지요. 내가 괜찮아야 단풍이 보이고 그 색이 어여쁘고 미소로 감동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별일 없는 일상과 마음의 여유는 인생을 향유하는 데에 반드시 꼭 필요한 조건이죠.

모든 감상의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단풍빛으로 물들어가는 마음도, 그림 한 점에 행복해지는 마음도, 모두 나의 상태에 달렸죠. 내가 힘든데 단풍이 들어올 리 없어요. 내가 어려운데 예술이 아름다울 리 없고요. 그래서 나의 컨디션은 우주보다 중요합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나의 균형은 온건해야 합니다. 내가 바빠보니 더 잘 알겠어요.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땐 널린 가을 하늘 한 번 올려다보는 일도 까맣게 잊는다는 것을요. 행여 냄새 고약한 은행알 밟을까 땅만 보고 다니지 고개 들어 황금빛으로 물드는 세상을 올려다보지 못한다는 것을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찾아가야 보는 것도 아니고요. 일상에서 작은 여유를 찾고 싶을 때, 다만 조금 느리게 걷기를 추천합니다. 그러다 멈추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잠시 머무르기를 권합니다. 분명 쉬기 좋은 벤치가 곳곳에 있을 거니까요. 서리풀공원, 양재시민의숲, 서초문화예술공원, 용허리근린공원. 단풍 명소는 도처에 있답니다. 심지어 우리 아파트 산책로에도 나무 아래 햇살과 바람이 너그럽게 자릴 펴주더군요. 퍼질러 앉아 올려다보니 단풍 사이로 햇살 다이아몬드가 반짝반짝.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문득 마음이 환하게 물들며 따뜻한 것이 스밉니다. 예술이 별건가요. 그리 보는 눈이 예술인 거죠. 모든 건 내 마음이 하는 겁니다.

잠깐 나무 아래 앉아보세요. 바스락바스락 가을이 해주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마음이 부풀고 잦아들을 테죠.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예술이 됩니다. 참 아름다운 단풍 예술입니다.

<HCN매거진 서초> Vol.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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