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공원 - 1
말죽거리공원 - 1
  • 강기옥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승인 2019.11.2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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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살면서 흙을 밟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골목 구석구석은 물론 아파트 입구까지 깨끗하게 포장된 환경이다 보니 흙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요원한 꿈이다. 문명화된 도시의 편린(片鱗) 속에서 흙냄새, 풀냄새가 그리워 시골에 가보아도 역시 흙을 밟을 수 없다. 논배미로 이어진 길도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고 농수로도 시멘트로 반듯하게 다듬어져서 논두렁이나 걸어야 흙을 밟을 수 있는 것이 요즈음의 농촌이다.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이 대부분이라 도시인들도 향토적 정서에 빠져드는 것이 일상적인 삶인데 이상하게도 웬만한 경제력을 지닌 상류층이나 소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흙 속에 산다. 양극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흙을 향유하는 특권층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흔한 흙길, 흙냄새가 문명과 비문명의 척도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계층인가? 흙과 동떨어진 도심의 인간인가, 흙을 향유하는 상류층인가, 아니면 흙을 벗어나지 못한 변두리의 소시민인가.

도시의 선진화는 도로율과 녹지율이 좌우한다. 서울은 자연공원으로서 도시공원 역할을 하는 산이 빙 둘러 에워싸고 있어 대부분의 지자체는 녹지율이 높다. 그러나 그 효용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실질적인 녹지의 가치가 달라진다. 즉 누구나 쉽게 오르고 가벼이 산책할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인지, 특별히 장비를 갖추고 제한된 시간에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인지의 여부에 따라 녹지율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웃한 관악산이나 북한산 등은 바위가 많은 골산(骨山)으로서 나이 든 사람이 오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어둠이 내리면 이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에 비해 서초에 있는 도시자연공원으로서 우면산과 서리풀공원, 몽마르뜨공원 등은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보전하고 있다. 그런데다 흙으로 구성된 육산(肉山)이라서 나이가 든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 쉽게 올라 흙을 밟으며 향토적 정서에 빠져들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서초구가 지닌 자연녹지의 특징이다.

그 좋은 자연환경이 경부고속도로에 의해 동서로 단절되었다. 요즈음 같으면 터널을 뚫어 형태를 유지했을 텐데 잘라버린 것이 아쉽다. 그 아쉬움을 달래듯 또 하나의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말죽거리공원이다. 서초구청과 양재고등학교, 외교사료관을 남쪽에서 위호(衛護)하고 있는 낮은 산이다. 양재고등학교 정문 쪽에서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자연친화적인 화장실이 있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오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능선을 타고 가로지르는 방법과 둘레길을 걷는 방법이 있는데 어느 길을 택하든 휴식과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곳곳에 핀 꽃들과 더불어 습습한 흙냄새가 피어오르는 숲길을 걸으면 누구나 자연의 주인으로서 풍요로운 느낌에 빠져들 수 있는 길. 그 길에서 양재고등학교 후문 쪽에 있는 정도전의 묘소도 찾아보면 ‘작은 산 큰 기쁨’의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 도심 속에서 누리는 탈 도심의 여유, 그것이 말죽거리공원이 주는 혜택이다.

<HCN매거진 서초> Vol.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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